어떤 하루

2017년 10월 8일 (일) 오전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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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이건 역사의 회오리 한복판에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른 한 사내의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1623년(광해군 15년) 4월 무장한 사내가 사납게 말을 몰아 배물다리를 건너 남태령 초입 승방평(僧房坪)으로 접근할 즈음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나룻배를 구해 한강을 남하한 건 천운이었다. 한양 도성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터였고 어쩌면 그가 속해 있던 경기도 장단부(長湍府·현재의 파주와 개성 일대) 결사대 500여 명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여우울음 소리를 뚫고 청계사를 향해 돌진하는 그는 착호군(捉虎軍) 전령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위해 설치된 착호군은 어떤 검문도 통과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말을 버린 그가 갑옷마저 풀고 청계산을 올라 마침내 사찰 경내로 들어섰을 때 날이 밝았다. 사내를 처음 발견한 승려 묘법(妙法)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타인들 눈을 피해 승방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묘법이 먼저 입을 뗐다.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낙담한 묘법이 염주를 쥐고 눈을 감았다. 연거푸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던 왕에게 절의 전답과 노비를 몰수당한 청계사는 몰락 직전이었고 유일한 희망은 원수 같은 왕이 제거되는 것뿐이었다. 사내가 쇳소리 섞인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하필이면 그 순간 찾아온 깨달음에 대해 사내는 설명하고 싶었다. 전날 아침, 그는 임진강 하류 북안에 자리 잡은 덕진산성에서 출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병(哨兵)이던 그는 임진강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강의 곡류 지점에 푸른 갈대숲으로 보이는 초평도가 있었고 그 너머는 파주 땅이었다. 흰꼬리수리와 따오기가 날아오르고 민들레와 질경이가 제멋대로 자라 있는 평범한 봄날이었다. 그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묘법의 질문에 사내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묘법과 그는 한 해 전 청계사에서 간행한 ‘법화경’ 덕분에 인연을 맺었더랬다. 사내의 집안은 절에 필요한 자금을 대대로 시주해온 단월가(檀越家)였다. 경전 간행 기념 법회에 초대된 사내는 묘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차츰 친밀해진 두 사람은 왕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사내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훔치며 대답했다.

깨달음은 초평도를 바라보며 잠시 현기증을 느끼던 순간 괴상한 전율로 엄습해왔다. 그는 처음에 그걸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혼동했다. 덕진산성에 집결해 반정을 준비하던 병사들은 지휘관이던 장단부사 이서(李曙)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장단부병 500여 명은 혹독한 훈련으로 죽음에 단련돼 있었지만 뒤늦게 반정군에 합류한 그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내면에서 울렁이는 전율과 불안은 마치 죽음 직전의 초조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불안은 이상한 설렘으로 변했다가 자신과 함께 우주 전체가 녹아내리는 대적멸(大寂滅)과 흡사한 체험으로 이어졌고 그는 혼절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기척에 정신을 차린 그를 부사 이서가 호출했다. 이서는 찰갑(札甲)으로 무장한 채 막사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나란히 놓인 환도와 투구가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박달나무로 만든 곤방(棍棒)을 손에 움켜쥔 이서가 천천히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김유가 상대의 살기에 압도되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고변(告變)의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아니 그럴 미세한 가능성만 느껴도 부하들을 참수하거나 곤방으로 머리뼈를 박살내던 이서였다. 뭔가 생각에 잠긴 이서가 곤방을 무릎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김유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선대왕 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이 그의 부친이었으니 금상에 의해 살해된 영창대군 그리고 영창을 낳은 소성대비(昭聖大妃·훗날의 인목대비)가 각각 그의 조카와 누이였다. 계축년에 북인들의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은 부친은 몇 년 뒤 부관참시에 처해졌고 대비는 서궁인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가 죽음이 두려울 리 없었다. 그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젓자 자리에서 일어난 이서가 다가서며 물었다.

말을 마친 이서는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김유는 조금 전의 섬광 같은 깨달음에 대해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막사를 나오자마자 무장 명령이 떨어졌고 마지막 식량으로 북어와 인절미가 지급됐다. 반정군은 즉시 착호군으로 위장했다. 왕의 발병부(發兵符) 없는 병력 이동은 엄히 금지돼 있었지만 착호군만은 예외였다.

부대는 활과 창으로 무장한 정예 기병과 호랑이를 추적하는 구렵군(驅獵軍) 복장을 한 보병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병이 속보로 먼저 출발하고 김유가 속한 기병이 뒤를 따랐다. 반정의 성공은 신속함에 달려 있었기에 부대는 휴식 없이 이동해 파주에 도착했고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가 몰고 온 부대와 합류했다. 김유가 탈영을 결심한 건 그때였다.

근심 가득한 표정의 묘법이 질문할 무렵 청계사 본당을 소제하는 부산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두꺼운 가죽버선인 다로기를 벗고 이리저리 찢긴 다리의 상처를 천으로 닦아내던 김유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잔인한 복수심이 사라졌습니다. 눈처럼 녹아버렸지요. 그곳에 있을 이유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연서역(延曙驛)으로 이동하는 도중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집결지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있던 한양의 선봉대와 만날 때까지 빈틈을 찾지 못했습니다. 장단부병들은 서로를 감시하도록 짜여 있었거든요.”

“홍제원에 닿고 보니 그 한양의 선봉대라는 게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대오도 없었고 무기도 몽둥이와 낫이었지요. 우리 부대가 그들과 뒤섞이며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홍제원은 왁자지껄 떠드는 온갖 시정잡배로 넘쳐나 장터처럼 소란스러웠다. 술에 취해 끌려나온 하인 중엔 자신이 무슨 일로 불려나왔는지 모르는 자가 수두룩했다. 잔치 자리인 줄 알고 꽹과리를 치는 자, 횃불을 떨어뜨리고 우는 꼬마, 싸리비를 무기로 쥔 머슴이 뒤섞여 서로 모인 연유를 묻느라 바빴다. 소동은 반정군이 옹립한 능양군(綾陽君·훗날의 인조)이 나타나고서야 멈췄다.

김유는 왕으로 인해 형과 아버지를 잃은 능양군의 눈빛에서 자신과 똑같은 필부의 복수심을 발견했다. 이미 분노로부터 벗어난 그는 다가오는 능양군의 시선을 외면해야 했다. 그냥 목도하기 고통스러웠다. 김유를 스쳐 지난 능양군이 열병을 마치고 이서에게 지휘용 깃발인 초요기(招搖旗)를 넘겨주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었다. 반정은 우매한 복수심과 맹목적 부화뇌동 속에 들뜬 축제처럼 그렇게 시작됐다.

마침내 창의문을 부수고 도성 안으로 진입한 이서의 부대는 궁궐수비대인 금군(禁軍)은 물론 비명을 지르며 도망하는 궁인까지 닥치는 대로 베었다. 피범벅의 살육이 이어지는 동안 변변한 저항은 없었다. 반정군에 포섭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훈련도감 정예병을 최대한 묶어두고 있어서였다. 그즈음 김유는 말머리를 돌려 궁을 벗어났다.

덕진산성에서 김유는 타오르는 듯한 신열 속에 자신이 불멸의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현실은 갑자기 권태로워졌고 풍경은 찌그러져 보였다. 기이하게 왜곡된 세계 한복판에서 그는 하염없이 다른 존재로 부화되며 영겁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가 겪는 모든 일은 처음이 아니었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반복된 것들이었다. 그게 왜 초평도를 바라보던 그 순간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끝없이 이어진 자신의 삶을 통해 무한에 연결됐고 이윽고 두려워졌으며 최후엔 한없이 외로웠다.

천신만고 끝에 도강해 한강 남쪽 노들나루에 도착했을 때, 김유는 절박한 고독과 희열에 감싸인 채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머뭇대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수통에 남아 있던 물을 천천히 마셨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어떤 삶이 상기된 건 그 순간이었다. 기억이 한 지점으로 파동치며 역류했고 그는 자신이 태어난 정유년 8월로 되돌아가 바로 직전 소멸한 또 다른 자신의 삶들과 마주쳐야 했다.

임진년에 발발한 왜란이 마무리되던 정유년(1597), 왜병이 다시 쳐들어왔고 그해 여름 김유가 태어났다. 그가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는 순간 전라도 남원에선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었다.

정유년 8월, 남원성에선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의 교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유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서 성의 북문을 방어하던 팽배수(彭排手·방패병)였다. 조명연합군의 전략은 애초 출발이 잘못되어 있었다. 연합군을 지휘한 명군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은 어리석게도 험지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버려두고 평지인 남원성을 전투 장소로 삼았다. 조선군 누구나 필패의 선택임을 알았지만 교만한 양원을 제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사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팽배수였던 김유는 본디 전라군영 소속 편비(偏裨·대장 아래 부장의 다른 이름)로서 이복남이 남원성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정했을 때 그를 따라 성에 들어간 50명의 결사대 중 한 명이었다. 남원성의 전력은 상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와 애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였다. 남원성에 들어가는 건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도 남원성에서 전사하고자 했다. 50명의 편비가 그와 함께 죽기로 결의하던 날 소나기가 내렸고 결사대는 비를 맞으며 남문을 통해 조용히 입성했다.

8월 13일부터 왜군 주력부대에 포위된 남원성은 16일 밤에 함락됐다. 명군이 지키던 남문과 동문 그리고 북문이 차례로 뚫리자 겁쟁이 양원은 조선군이 혈전을 벌이며 사수하던 서문을 통해 도주했다. 지휘부마저 붕괴된 연합군은 차츰 북문 쪽으로 몰리며 궤멸 직전에 처하게 되었다. 승기를 잡아 연합군을 협공하던 왜군은 조총부대를 뒤로 물리고 백병전을 벌였는데 그건 차라리 사냥에 가까웠다.

조선군의 방패는 강한 왜검에 두 동강 나기 일쑤여서 김유가 속한 팽배수들은 사수와 장창수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최후까지 북문에서 저항하던 편비들은 마침내 이복남을 중심으로 둥근 원형진을 만들었다. 방패를 버리고 창을 쥔 김유도 그 안에 있었다. 이복남이 외쳤다.

편비들의 진법은 두 겹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깥 원의 장창수가 접근하는 왜병을 찌르고 몸을 숙이면 안쪽 원의 편곤수(鞭棍手)가 도리깨 모양의 편곤을 휘둘렀다. 찌르고 휘두르고를 그렇게 끝없이 반복했다. 기병이 주로 쓰는 무거운 편곤을 휘두르던 안쪽의 편비들이 먼저 지쳤다. 찌르고 휘두르는 속도가 조금씩 둔해졌고 성벽에 몰린 결사대는 반원 형태가 되었다. 가볍게 싸우기 위해 갑옷을 푼 김유는 허리춤의 편도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성벽 위에서 조총 격발음이 울렸다.

묘법이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김유는 비로소 몸을 누여 깊은 잠에 빠졌다. 동료의 비명과 매콤한 화약 냄새가 꿈자리를 휘저었다. 마흔아홉 명의 편비가 저마다의 운명을 호소하다 제각각 다른 생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악귀의 모습이었다. 꿈속의 김유는 자신의 정체 역시 악귀였음을 비로소 자각하고 전율했다. 50명의 악귀가 우주를 떠돌며 저지른 만행이 눈앞에 차례로 펼쳐졌다.

무수한 살육의 기억을 되풀이하던 그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때 절은 다시금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봄비가 후드득거리며 내리다 이내 그쳤다.

김유는 자신의 기억에 파고든 여러 차례의 삶을 확신할 수 없었다. 불멸의 운명 역시 환상 같기만 했다.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지옥을 건너온 셈이었다. 호롱불을 켜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문득 묘법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를 떠올렸다. 자신이 겪은 기이한 하루가 ‘법화경’의 미묘한 응보일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청계사는 김유 집안이 대대로 가문의 안녕을 빌던 복전(福田)이었다. 이런 곳에서 출가하면 어떨까 상념에 젖던 그는 묘법을 찾기 위해 승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출처 : n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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