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어도 누군가엔 잊혀진 하찮은 인생들의 쓸쓸한 독백

2015년 4월 2일 (목) 오후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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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어도 누군가엔 잊혀진 하찮은 인생들의 쓸쓸한 독백

함정임(51·사진)의 여덟 번째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쓸쓸하다. 뚜렷한 줄거리를 기대하기보다 단편이 지니는 정제된 문장과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기꺼이 선택할 만하다. 회색 톤의 잔잔한 레퀴엠 같은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맞춤하다.

‘오후의 기별’은 지인이 전하는 “갸가 갔다”는 기별로 시작한다. ‘갸’의 네팔 이름은 ‘소누’. 이 소녀는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흰 연기 속에서 꼬치를 굽던 인물이다. 화자인 나 ‘박’이 네팔에서 장기 체류하면서 보일 듯 말 듯 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이 소녀, ‘소누’에 대해 연정을 키운다. 박에게 그녀의 이름은 ‘안나’였다. 히말라야 아랫마을 포카라 사람들이 여신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안나푸르나’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신 같은 안나를 박은 지켜만 보다가 귀국한다. 한창 민감하던 중학생 때 어머니를 여의고,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가운 유리만 만지는 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이였다. 그래서인지 늘 찰랑이고 철썩이며 여울지는 물소리가 좋아 포카라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안나를 조각배에 태우고 좋아했다. 그 안나가 죽었다는, ‘갸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네팔로 날아가, ‘갸’의 내생을 기원하는 단편이다.

갸, ‘안나’는 이승의 반복되는 지루한 연기 속의 꼬치 굽는 삶을 묵묵히 인내했다. 내생을 기다리며. 박은 그네를 연모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내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그네를 장악하지 못했다. 다만 쓸쓸할 따름이다. ‘구두의 기원’의 주인공은 달팽이관어지럼증에 시달린다. 이승의 삶을 상징하는 질병이다. 그것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때까지 낫기는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이 대수롭지 않게 읽힌다.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유골을 살피는 고고학자가 등장인물로 나서는 ‘밤의 관조’에서는 무릎관절 뼈 중 하나인 ‘슬개골’로 운명을 바꾸는 장례풍습이 소개된다.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신라 우물과 그 안의 어린아이 인골과 더불어 삶의 모호한 안개를 보여주려는 작의가 보인다. ‘꽃 핀 언덕’의 ‘L’이란 사내는 “죽음을 입에 올릴 때면 단 과육을 깨물기 직전의 악동처럼”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이 단편의 주요인물 ‘U’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시종 독자들을 끌고 가는 궁금한 대목이지만, 작자가 밝히지 않았듯이 생사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살아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죽은 사람인 사람도 있다. 함정임은 이 소설집 작가의 말을 시처럼 써 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세상 어느 한 곳/ 어느 하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다.// 미처 다가가지 못한/ 미처 풀지 못한/ 미처 주지 못한// 그들에게/ 이 하찮은 소설 조각들을/ 바친다.”

출처 : 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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